어쩌다 보니 사중인격_일을 몰고 다니는 자

어쩌다 보니 사중인격

…인성에 문제는 없습니다만



글. 손수현
정리. 이가람 



ⓒ 임은영



카피 6년 차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치열한 광고업계에 대하여


광고업계에 발을 들인 첫날,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집요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란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떠오를지 모르는 만큼 금방 휘발돼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아이디어뿐 아니라, 회의 자리에서 나온 모든 의견을 세세히 기록해두는 일,
이 또한 카피라이터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흔히 업계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말하는 카피라이터 인턴도 광고 회사 일 년이면 제법 광고인 흉내를 냈다.
6년이면 성격까지 달라졌다. ‘부지런’이란 형용사보다 ‘게으른’이란 형용사가 잘 어울리던 내가
매일 조금씩 변해갔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일을 하다 보니 느긋했던 성격에 가속도가 붙고,
여러 의견을 귀 기울여 듣다 보니 기억력마저 무섭게 향상됐다. 나를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친구들은 경악할지도 모른다.
제시간에 출근한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스타일인 내가
완전히 다른 얼굴로 살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밥벌이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때로는 그 힘에 감사한다.
평소의 나와 일할 때의 나는 완전히 달랐으면 하니까. 밥벌이 정도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일을 몰고 다니는 자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한 지 1년이 지났다. 팀 막내로 오게 되었지만 이직 경험만큼은 내가 선배에 속한다.
근무한 지 1년이 넘어갈 때쯤이면 나는 어딘가에서 면접을 보고 있었다. 좋은 건 너무 좋고 싫은 건 또 너무 싫은
내 성격이 매년 또렷하게 드러났다. 회사에 대한 불만이 일정 기간 버텨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조용히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새 이력서를 준비했다. 다 같은 광고 회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각기 다른 분위기의 세 회사를 거쳤고, 지금 있는 회사에서 1년 넘게 정착 중이다. 거쳐간 회사 중에서는
1분만 지각을 해도 사유서를 써야 하는 곳도 있었고, 12시간씩 죽음의 등산을 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올 한 해도 잘 풀리게 해달라며 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었다.
그땐 뭣도 모르는 핏덩이 신입이라 하라면 해야 하는 건가 보다 했다.
어떤 일이 주어지든 착실히 해내야 좋은 신입이라고 믿었다.




ⓒ 임은영



머지않아 그 믿음은 산산이 조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쓸데없는 것들까지 해냈구나 싶다.
불필요한 야근조차 열정이라 믿게 만든 곳, 일방적인 업무수행 방식으로 의견 하나 내놓지 못하게 만든 곳,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곳이 내 청춘을 야금야금 갉아먹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땐 몰랐다.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회사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광고할 수 있구나’를 처음 깨달은 것이다.
매일 달고 살던 두통과 감기가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시달리던 악몽과 가위 눌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생활이 안정될수록 불안한 마음은 커졌다.
지긋지긋한 징크스가 또 얼굴을 내밀까 염려스러워서다. 지난 6년을 돌아보면,
내가 합류하게 된 팀은 무섭게 일이 몰아치는 끔찍한 징크스가 늘 있었다.
“우리 팀은 일이 한꺼번에 몰리진 않아”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배도 요즘 들어 고개를 자주 갸우뚱한다.


오늘 아침엔 전 직장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퇴사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일이 싹 빠져버렸다고.
정말 대리님이 일을 다 짊어지고 나갔나 보다고. 사람에게 평생 일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30대에 모두 써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한편으로는 50대엔 남들보다 여유로운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믿음도 생긴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한번 믿어보시길. 나는 평생 일할 양을 미리 채우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 위 글은 『어쩌다 보니 사중인격』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더 많은 에피소드는 책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저자 소개


손수현
6년째 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
3번째 결혼기념일을 앞둔 아내
3남매 중 둘째 딸
7년째 고양이를 모시고 있는 집사


다음카카오 제2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다. 에세이 『누구에게나 그런 날』과
『지극히 사적인 하루』를 출간했다. 오랫동안 글 쓰는 사람이 되고자 틈틈이 읽고, 쓴다.
종종 독서 모임을 진행하고 글쓰기 강의를 한다.


suri1987@naver.com
brunch.co.kr/@shoostory



일러스트 임은영 (인스타그램 @im_eun_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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