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통역이 되나요_한 평 반, 통역사들의 공간

인생도 통역이 되나요
제대로, 유연하게 언어보다 중요한 진심을 전합니다



글. 정다혜
정리. 이가람



한 평 반, 통역사들의 공간





‘On Air’에 불이 들어오고 생방송이 시작되듯 통역 부스 안에 가득한 긴장감을 뚫고 통역기의 빨간 스위치를

켜는 순간, 내 입에서 나가는 모든 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숨소리까지 온전히 전체 회의장으로 전달된다.

동시통역은 생방송이다. 그리고 매번 다른 분야, 다른 주제, 다른 연사의 말을 통역한다.

오늘은 대통령의 말을 전달했다가도 내일은 과학자, 그다음 날은 예술가, 법조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애드리브가 생방송의 묘미라고 하지만, 통역사들에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경력에 상관없이 심장이 발등까지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를 찾는 아찔한 순간이다.


사회 초년생일 때와 비교해 나아진 점이 있다면 외부 요인으로 인해 통역에 지장을 받은 경우

내 탓으로만 여겨 자책하기보다 통역사로서 최선을 다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 앞으로 대처할 방법을 궁리한다는 것이다.

결국 답은 없다. 불안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하는 것뿐이다.

통역은 별다른 준비 없이 행사 당일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비유하면 조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10년 차 베테랑 가수에게 처음 보는 악보를 생방송 직전에 쥐여주고, 바로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잘 부를 수 있을까. 그나마 악보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것이다. 악보도 없이 처음 들어보는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가수는 과연 몇이나 될까.





통역은 자료와의 전쟁이다. 보통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오랜 세월 연구하고 쌓아온 지식을 다듬어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통역사들은 회의장에 모인 전문가들만큼 해당 분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말과 대화를 알아듣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통역사에게 주어지는 준비 기간은 보통 길어야 1~2주 정도다. 연사들도 마지막까지 자료를 수정하느라

통역사들에게 최종 자료가 전달되는 것은 회의 전날인 경우가 많다.

이 말인즉슨, 하룻밤 안에 고도의 전문적인 내용을 공부하고 용어를 외워야 한다는 뜻이 된다.
통역의 중요성과 메커니즘을 잘 아는 연사들은 자신의 발표 내용 중 특정 단어로 통역해주길 원하는 부분에는

영어 또는 한국어로 표시해준다. 한국어로 발표를 하다가도 중요한 전문용어는 영어로 다시 말하기도 하는데,

그 신호를 통역사들이 놓칠 리 없다. 통역사들이 봉준호 감독을 높이 사는 이유는 자신의 말이 통역될 것을 인지하고

말을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연사와 호흡이 잘 맞으면 더 좋은 통역이 나갈 수밖에 없다. 자료를 미리 주지 않아도,

말의 논리가 없어도,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중언부언하더라도 통역은 알아서 매끄럽게 나가겠지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연사의 언어 습관까지 놓치지 않고 준비하려면 족히 한 달은 필요할 것 같지만 통역사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일반 기업이나 국가 기관에서 활동하는 인하우스 통역사의 경우, 같은 분야만 계속 통역하기 때문에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는 장점이 있다. 반면, 프리랜서 통역사는 매번 다른 주제를 통역하기 때문에

하나의 행사가 끝나면 머릿속을 비우고 다음 주제를 새로 공부한다.


뼛속까지 문과인 나지만 이과 출신 박사들이 가득 모인 세미나에서 양자 컴퓨팅, 양자역학과 관련된 통역을 했다가도,

다음 날은 이탈리아 패션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해 온갖 명품 브랜드의 디자인 트렌드에 대해 통역하기도 한다.

패셔니스타들이 가득 모인 화려한 행사가 끝나면 나는 또 곧장 구치소로 달려가 수감 중인 피고인과 변호인의

접견을 통역하기도 한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다이내믹하다. 그만큼 절대 익숙해지지 않아

끝없이 공부하고 연습해야 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킬 다음 스텝을 찾게 해준다.



※ 위 글은 『인생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글 전문은 책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저자 소개
정다혜(Dahae Chloe Jung)

국제회의 통역사. 영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후 중앙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UN마약범죄사무소에서 주니어 연구원(Junior Researcher)으로, 외교부에서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근무했다.

테크앤로 법률 사무소에서 전문 위원으로도 일했으며, 최근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생중계 동시통역을 비롯해

청와대 조약 서명식, 2019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 등 다수의 국빈 행사에서 통역을 했다.
말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언어를 넘어 진심까지 전달하는 통역사를 꿈꿨다.

이제는 10년간의 활동을 밑거름 삼아 국제법을 연구하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고려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instagram @dahaechl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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