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기호로 읽는 디자인 이야기 7

근대 디자인 교육 기관으로서의 바우하우스

 

천재희

간결성과 명확성이 두드러진 말끔한 디자인보다는, 생각을 자극하고 참여의 여지를 남기는 디자인에 대 해 관심을 기울인다. 최신의 디자인 전문지를 보는 것보다 박물관 유리 너머의 ‘아주 오래된 디자인’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의 최신 버전을 사용할 때에도 가장 먼저 확인하는 일은 아주 오래된 구(舊)버전의 기능이 남긴 흔적을 찾는 일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의 조형 실험 에 동참하고 디자인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산업시대 새로운 조형 교육에 대한 의지

‘두닌 백작의 강철인간’이라는 금속 로봇을 등장시킨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이행된’ 생활 세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체험하게 한 전시였다. 그러나 박람회가 보여주고자 한 풍요로운 물질 세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인간의 손을 떠나 ‘형태를 만드는 기계’가 쏟아낸 물건의 조악함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결과였으며, 오히려 수공예적 미감을 가진 물건에 대한 욕구를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박람회를 통해 확인한 산업 생산물의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미술 교육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구체적으로 이는 기계 생산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이를 예술적인 형태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공예가 양성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산업 생산물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기계 생산을 전제로 한 새로운 조형 교육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국가들 사이에 공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문제에 있어서 선도적인 국가는 독일이었다.

 

독일 미술의 개혁, 순수미술 조형에서 산업 생산물 조형으로

19세기 이래 독일의 미술 교육 개혁은 전쟁 이후 궁핍해진 국가 경제와 열악한 생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행되었다. 교육 목표는 미술 교육의 기초를 공예 훈련에 두는 것이었다. 이는 아카데미 미술을 위한 행위로 묶여 있었던 조형 활동의 범위를 산업 생산의 영역으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당위를 선언한 것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1914년 당시 80여 개의 독일 미술 교육 기관 중 61개 미술 학교가 이러한 공예 훈련 중심의 미술 교육으로 독일 사회가 요구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중 뒤셸도르프 미술 공예 학교와 브레스라우 아카데미는 순수미술과 건축, 공예를 통합적으로 교육시킨, 대표적인 학교였다. 특히 페터 베렌스가 이끈 뒤셸도르프 학교는 독일 최초의 근대 미술 교육 기관이었다. 디자인 역사에서 공식처럼 읊조리는 ‘근대 디자인 교육 기관으로서의 바우하우스’는 바로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문을 연, 조형 교육 기관이었다.

 

산업적 형태에 대한 고민, 실험적 조형 교육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은 중세 건축직인의 조합을 의미하는 바우훼테와 ‘농사를 짓다’라는 뜻의 바우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모든 조형 활동의 근거를 생활 속에서 찾고 이를 사회주의 대성당의 건축을 통해 이룰 것을 선언한 바우하우스는 미래의 공예가들을 위한 작업 공동체의 기원을 바우훼테에 두었으며,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농사 일의 가치를 학교 이름에 새겨 넣음으로써 反아카데미 교육에 대한 인식을 표면화했다. 1919년 4월, 바이마르에서 개교한 바우하우스는 교육 프로그램 전문을 발표한다. 이에 따르면 바우하우스 교육의 목적은 ‘기념비적인 미술과 장식 미술의 구분이 없는 통일된 미술 작업을 새로운 건축에 필요한 요소로 재결합’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 원칙으로 ‘공방 중심의 기초 교육 훈련과 수공예에서 발전된 유기적 형태에 대한 탐구, 산업 지도자들 및 대중과의 접촉을 위한 전람회 연구’가 강조되었다. 교육 범위는 공예 실습, 소묘 및 회화 실습, 과학과 이론 분야로 세분화되고 각각의 분야는 구체적인 교육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프로그램은 도제, 직인, 준마이스터로 이어지는 교육 과정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마르에서 개교 당시 발표된 교육 강령은 1923년, 대대적으로 치러진 바우하우스 전시를 기점으로 상징적인 문서로 남게 된다. 이는 ‘예술과 기술, 새로운 통합’을 발표하며 선보인 다양한 제품과 가구, 도자기, 인쇄물, 회화 작품, 연극 공연, 실험 주택이 사회주의 대성당을 지향하는 교육 이념으로부터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전시회 이후, 정치적 탄압을 피해 1925년 10월, 데사우에서 다시 시작한 바우하우스는 산업디자인을 목표로 한 교육 기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기계적 조형을 향한 노력은 수공예를 산업 생산물의 형태적 규범을 창조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수공예적인 물성 회복을 위해 집중했던 공방 교육을 산업시대의 물적 양식을 탐구하기 위한, 실험 교육으로 정의한다. 그로피우스는 1926년에 발표한 <바우하우스 제품의 원칙>이라는 글에서 바우하우스의 모든 교육은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주택과 제품 생산을 목적으로 하며, 공방은 그것을 위한 실험실로써 산업시대에 적합한 ‘전형적인 제품 모델을 개발하는 연구실’임을 강조한다. 데사우 시기의 교육을 규정한 그로피우스의 이러한 생각은 후임 교장으로 부임한 한스 마이어와 미스 반 데어 로에에 의해 한층 강화되며 기계 미학을 전제로 한 형태 실험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초기 바이마르 시기를 지나 데사우 시기로 진입하면서 본격화된 기계 미학에 대한 실험은 1933년 베를린 바우하우스 폐쇄 이후, 미국적 자본주의 토양 위에 ‘바우하우스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안착한다.

 

바우하우스에대한 시선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바우하우스는 대중들, 정부기관, 비평가들에 게 끝까지 비호감이었다. 돈줄을 죄는 정치적인 탄압과 물자 부족,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교수들 간의 의견 충돌과 학생들의 시위, 비평가들과 대중들의 야유 등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도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인공의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며, 교육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산업시대 생산 양식에 대한 바우하우스의 조형 실험은 이러한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험이란 실제로 해보는 것,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해보는 것으로써 도전과 저항,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바우하우스의 조형 실험이 가지는 의미는 기계 생산물에 대한 정서적 반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과 형식을 실제화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실험 정신을 산업적 생산 형태를 고민하는 데 집중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바우하우스의 조형 실험이 남긴 시각적 형식보다는, 실험이 자리했던 지점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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