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g:

서체이야기

 

페트 도이치 슈리프트(Fette Deutsche Schrift)

글. 김현미

SADI(Samsung Art and Design Institute)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 교수

 

이달의 g: 서체는 독일의 루돌프 코흐(Rudolf Koch, 1876-1934)가 디자인한 블랙레터, ‘페트 도이치 슈리프트(Fette Deutsche Schrift)’이다. ‘굵은 독일 글자체’라는 이름 그대로, 블랙레터 중에서도 가장 독일적인 ‘프락투르(Fraktur)’ 계열의 서체이다.

중세 유럽에서 쓰던 글자체는 블랙레터였다. 최초의 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책은 당시의 손글씨인 블랙레터를 활자로 만들어 인쇄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자가 현재 우리가 주로 보고 사용하는 ‘로만 서체(roman type)’로 그 판도가 바뀐 것은 르네상스의 영향이었다.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던 인문주의 학자들은 수세기 전의 고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칼 대제(Charlemagne, 742-814)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글자체, ‘카롤링 왕조의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에 주목하게 되었다. 둥근 글자 형태가 많아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밝고 개방적인 지면을 만들어주는 이 글자체는 ‘화이트 레터’라는 개념으로 여겨졌다. 책의 내용에서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중세의 지면을 이루는 글자체와 결별하기 위해 인문주의 학자들은 의식적으로 ‘화이트 레터’를 선택하면서, 당시의 굵고 각지고 압축된 형태의 글자체에는 ‘블랙레터’라는 다소 비하하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블랙레터의 모체 또한 카롤링 왕조의 소문자였다. 둥글고 개방적인 소문자가 특징인 이 유럽의 표준 글자체는 수백 년을 지나는 동안 기후와 민족성에 따라 각기 다르게 진화하여 서로 다른 양식의 블랙레터가 되었다. 블랙레터를 쓰던 유럽의 국가들이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급속히 로만 활자체의 인쇄 풍경으로 변하는 동안 독일은 그 변화가 매우 더디었는데 이는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과 유럽의 정치·사회 전반에 큰 변혁을 일으켰는데 개혁의 아이콘인 루터의 개신교 독일어 성경책이 블랙레터로 인쇄되면서, 이 특정 글자체가 독일 국민에게는 독일성의 표상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모더니즘의 바람이 불고 독일의 바우하우스가 산세리프 서체의 사용을 주장하고, 파울 레너(Paul Renner, 1878-1956)가 ‘푸추라(Futura)체’를 발표하던 시기에도 “독일의 모든 책의 57%, 잡지의 60%가 본문으로 블랙레터를 사용했으며 그중 90%가 프락투르 계열이었다”고 한다.1

 

 

(위)14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인쇄된 기도서(The Missal), 로만 서체가 도래한 이후임에도 여전히 블랙레터로 인쇄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1936년 출판된 책에 쓰인 프락투르 서체 ‘클라우디우스(Claudius)’. 루돌프 코흐가 디자인하고 그의 아들이 활자로 완성시켰다.

히틀러가 ‘국민의 글자체’로 공표한 블랙레터는 때문에 나치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치는 1941년 다시 공식적으로 ‘로만 서체’를 쓰기로 번복했는데, 궁색한 변명으로 독일 역사 속 인쇄 산업을 점령하고 있던 유태인을 들먹이며, 블랙레터를 ‘유태인이 만든 글자’라는 어이없는 누명을 씌워 천대하였다. 실제 이유는 점령국에서의 문서 소통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면서 말이다.

루돌프 코흐는 바로 이런 격변의 시기의 활자 디자이너였다. 디자이너들에게는 기하학적 산세리프 서체인 ‘카벨(Kabel)’, 아프리카의 이미지로 거의 고정된 ‘노이랜드(Neuland)체’ 등의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특히 노이랜드체는 영화 <쥬라기 공원>의 시각적 아이덴티티로 더욱 유명해졌다.

코흐는 30세에 오펜바흐(Offenbach)의 ‘클링스포어(Klingspor)’ 활자 주조소의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하여 이곳을 평생의 일터로 삼고 수많은 서체를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서체의 반 이상은 독일의 글자체인 블랙레터였다. 탁월한 손글씨의 감각으로 질서정연한 블랙레터 서체들을 만들어내면서도 시대적 흐름과 요구를 거스를 수 없어 산세리프 서체들로 외도를 했던 코흐의 작업 이력은 이 시기 독일의 글자 풍경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블랙레터는 유럽 역사의 산증인이다. 이제까지 블랙레터는 맥주병 라벨에서 독일성을 표현하거나, 헤비메탈 밴드의 앨범 재킷이나 문신에 활용되는 등 주로 언더 문화에서 중세의 어둡고 장식적인 이미지, 금기된 이미지 등을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좀 다른 기류가 감지된다. 많은 폰트 디자이너들이 포화상태인 듯 싶은 로만 서체의 디자인으로부터 블랙레터의 영역에 눈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흥미롭게 개작된 수많은 블랙레터 디자인이 출현하고 있다. 이를 집대성한 책 「내사랑 프락투르(Fraktur mon Amour)」(2008), 스포츠 브랜드 ‘리복(Reebok)’의 글로벌 시각 캠페인에 등장하는 블랙레터가 이러한 기류를 증명하기도 한다.

‘텍스투라(Textura)’, ‘로턴다(Rotunda)’, ‘슈바베허(Schwabacher)’, ‘프락투르(Fraktur)’ 등 여러 양식에 걸친 블랙레터의 차별적이고 장식적인 글자 형태들은 새로운 시각 표현의 보고이다. 1000년의 역사를 등에 진 글자로써, 블랙레터라는 이름에는 늘 여러 기호가 붙어 왔기에 활발한 활용에 제동이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대의 디자이너들은 이런 기호로부터 탈피하여 블랙레터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 세계를 좀 더 즐겨도 좋을 것 같다.

주1. P27, Blackletter: Type and National Identity, Philipp Th. Bertheau,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도판출처

Type & Typography, Phil Baines & Andrew Haslem,

Watson-Guptill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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