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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haus

바우하우스에서 이상적 현실주의를 찾다 

 

에디터. 김상미

사진 출처. 『bauhaus 1919-1933』, Wikimedia Commons., V&A museum

 

데사우 바우하우스 빌딩

 

“나는 바우하우스가 세계에서 그런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_ 미스 반 데어 로에 

겨우 14년 세상에 존재했던, 독일의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로부터 우리는 많은 의미를 찾아 그 의의를 부여하고 칭송해 왔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체제의 위계를 불식시키고, 졸업생이 곧이어 선생이 될 수도 있던 파격적인 임용 체계는 제아무리 그들로부터 많은 부분을 채택해 왔다 한들 우리에겐 그저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적 유토피아에 그칠 수도 있다. 사실상 바우하우스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은 ‘기능적 기계로서의 주거지’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상품화했던 심플하고 장식이 없는 미니멀리즘의 정도와 현대적 미학의 관점이 전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식은 바우하우스 원형의 이상향과 맞물리고 신화처럼 팽창하고 있다. 가장 경제적인 것은 가장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능적이지만, 저렴하고, 아름답지만, 혁신을 가지는 또 다른 이상향을 꿈꾸며 더 나은 아이디어를 쫓아 천착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노동의 잉여를 생산하지는 않는지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결국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기 위하여 우리는 그렇게 반복적인 redesign을 추구한다. 주관성을 포기하고 보편적 공감에 손을 드는 것에 반기를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우하우스로 비롯된 물적 모더니즘의 형태는 다시 한번 변화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지 모른다. 바우하우스가 독일 사회의 시대적 자기반성과 변혁의 기회를 찾았음을 기억했으면, 결론적으로 바우하우스를 통해 깨달아야 할 점은 현실과 직면한 또렷한 이념과 정신이 깃든 ‘우리만의’ 디자인과 교육사상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일 테니까.

 

 

바우하우스의 커리큐럼을 도식화 한 드로잉. 정보를 효율적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당시 정보디자인 체계를 엿볼 수 있다.

 

 

 

History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였던 1.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되었다. ‘바우(Bau)가 ‘건물’을 의미하지만, ‘농사를 짓다’는 바우엔(Bauen)의 의미까지 고려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결국 씨를 뿌리고 결실을 얻겠다는 사상이 담겨있다. 그로피우스는 모든 조형예술을 하나로 합쳐, 새로운 건축예술의 필수적인 구성으로 만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주된 이념은 예술과 기술을 종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에서는 2.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폴 클레(Paul Klee),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3.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초기에는 미술교육의 개혁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결정, 그리고 여기에 요구되는 희생에 대한 의지로 특징 지어진다. 당시 경제 위기에 휩싸인 바우하우스는 목표를 ‘이상주의와 사실주의를 적당히 배합시킨 형태’로 수정하였고, 1923년에 이르러 예술과 기술의 통일이라는 연구성과를 평가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텐이 내부적 이견의 차이로 바우하우스를 떠나고, 4.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가 후임으로 참가하였다. 이 때부터 뚜렷한 교육방침이 정착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게 된다. 우선 예비과정으로 기초 조형훈련을 받고 토목·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글라스그림·직물·인쇄의 각 공방으로 진급한다. 조형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뒤 공작교사에게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 익히는 것이다. 1925년에는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될 위기를 맞았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갔다.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수진 12명 중 최소 6명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출신으로 무엇보다 그들은 젊고, 다재다능 했다. 이 시기부터는 새로운 생산방식과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가 되는 상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9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도 기여한다. 1928년 그로피우스는 교장직을 사임한다. 본업인 건축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후임으로 스위스 건축가 5.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5가 임명 되었고, 건축학과를 건축이론, 실기와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나누는 등 학교 행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건축이 모든 의미의 미적 과정이라고 역설하였다. 그의 임기 동안 여러 공방의 생산물들은 학교에 큰 수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하지만 교수들은 그의 사회학적 접근 방식을 비판하며 회의를 느끼고 결국 1930년 6.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새로운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정치적 오점 제거를 위해 학생들의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하여 원성을 산다. 하지만 마이어에 비해 외형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등 미학적인 정확함을 요구하였다. 그는 1932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데사우를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학교로 설립하였으나 1933년 ‘퇴폐예술’로 규정한 베를린 경찰에 의해 폐쇄, 해산되었다. 이후 망명 교사나 졸업생들이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이후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사라진 바우하우스는 그러나 많은 곳에서 그 성과가 재현되었다. 주택은 물론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물건, 신문, 타이포그래피 등, 무수한 분야에서 바우하우스의 영향력과 그 흔적을 발견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법과 교육이념은 이후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예술 교육과정에 포함될 만큼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바우하우스에서 출간된 계간지 <Bauhaus>

신 타이포그래피에 입각한 잡지 디자인은 라슬로 모호이너지, 헤르베르트 바이어, 요스트 슈미트 등이 디자인에 참여했다.

2. 『bauhaus 1919-1933』

bauhaus Archiv Museum of Design 저. Taschen 발행. 독일 베르릴에 위치한 바우하우스 아키브 미술관은 바우하우스 활동과 영향을 받은 자료와 작품을 수집, 보관,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곳으로 이 책은 타셴 25주년 기념 총서의 하나로 발행, 바우하우스의 주요 컬렉션과 워크숍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3. 『바우하우스』 Frank Whitford 저. 이대일 옮김. 시공아트 발행

바우하우스의 시대적 배경과 사건을 정리, 그 안의 이념과 교욕방법을 기술한다. 바우하우스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내부의 갈등 및 사회적, 정치적 문제도 다루고 있다.

 

 

4. 데사우 바우하우스 내 외부 사진.

오른편 하단의 강당 착석의자는 Marcel Breuer, 천장조명은 Max Krajewski가 디자인하였다.

 

 

Eugen Batz의 광고수업 중의 결과물

주로 레터링, 사물과 면, 3차원 사진을 이용하였으며, 마케팅 컨셉을 포함한 모던 광고와 그래픽을 다루는 수업이었다.

 

 

2.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투어 전시회 포스터

바우하우스에서는 광고 워크숍을 통해 전시 포스터 등을 제작하여 직접적 수익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3. 요스트 슈미트(Joost Schmidt)가 디자인한 1923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전시회 포스터

1923년 8월 15일~19일 바우하우스의 첫번째 공식적 전시회에는 모홀리나기 임용 후 학교의 방향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4. 사진가로도 활동했던 Erich Comeriner의 타이포그래피 작품

단순히 무용가 Gret Palucca를 위한 포스터가 아니라 자유로운 스터디의 결과이다.

5. 바우하우스의 교육자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의 수업 포스터

그는 ‘유니버설(universal)’ 체를 만들어 산세리프 활자만을 사용, 신 타이포그래피로 나아가는 혁신을 일으킨 인물이다.

 

 

 

1.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격자의자, 1924

바우하우스의 대표적 디자이너이자 교사였던 마르셀 브로이어는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를 선보였다. 그 중 리트펠트와 데 스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나무의자 두번째 버전으로 메이플 나무와 말의 털을 패브릭으로 사용했다.

2. Otto Lindig 주전자, 1922

바우하우스에서 도예수업을 담당한 Otto Lindig의 뚜겅있는 주전자 작품. 이 모형은 후에 금속 수업에서도 발견되어 현대의 주전자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한다.

3. Marianne Brandt/Hin Bredendieck 데스크 스탠드, 1929

Kandem company를 위해 디자인한 것으로 이후 대량 생산되어 판매된 제품이다. 가구기업 이케아(IKEA)의 대량생산된 스탠드들 역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Karl J. Juck, Wihelm Wagenfeld 바우하우스 스탠드, 1923/4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고전이면서도 현대적 조형미를 느낄 수 있다.

 

 

 

Interview

이대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및 동 대학원 디자인과 졸업. 현재는 명지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문진>포럼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 『조형의 원리』,『초현실주의 미술』,『상징주의 미술』,『야수파』,『근대 건축과 디자인』, 『공예가의 길』등을 번역, 저서로는 시집 『풀씨들』, 장편소설 『회색 스웨터의 회상』, 『길』등이 있다.

 

바우하우스에 관한 책을 번역하였다. 작업하면서 바우하우스에 대해 느낀 점은

바우하우스의 20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전개 과정이 하나의 역사서란 생각이 들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이것을 운동으로 의식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학교가 창립하여 마지막 폐교까지의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공예 사회에서 기계 사회로의 적극적인 인식전환이다. 하지만 바우하우스에서 일어난 물적 양식의 변화를 비단 바우하우스만 주도했던 것은 아니다.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와 다양한 움직임 가운데 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Mass Education 측면으로 보았을 때 본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면서 의식적인 가치를 실천했다고

보아야 한다. 미술이라는 것은 공예의 보다 상승된 형태로 보았다. 즉, 사회적으로 고급한 가치로 인정되는 fine art와 craft가 결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생활 예술이 돼야 한다. 요즘 말하는 ‘응용미술’이라는 말은 결국 일상에 ‘미술’이라는 것이 기본 조형 베이스로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피우스가 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예술과 기술의 하나되는 과정을 추구 함에 있어 내부적으로는 교수 간의 갈등이 많았다. 형이상항적 측면을 붙들고 싶은 측과 기능주의적 부분을 알아야 한다는 측의 대립이다. 결국 후자가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교육자의 입장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이나 방침들이 현재의 미술교육 실정에 비추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었나

교육에 있어서 비전이 부재한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특히 예술에 있어서의 교육적 비전과 역사적 반성이 부재했다. 바우하우스가 공방 생산 방식에서 공장제 생산방식으로 뒤바뀌면서 야기되는 조직적인 교육 시스템을 확립한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맹목적으로 쫓으며 과연 바우하우스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의문스럽다. 커리큘럼을 저학년, 고학년으로 나누고 교육을 체계화 시켰다는 것을 제외 하고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서양에서 조형시스템적으로 이러한 변화가 있으니 그대로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다. 마치 911을 순서만 바꿔 119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바우하우스에 대한 역사 인식, 현실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독일에서는 1차 대전 이후 사람들은 굶주렸고,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집합 주택 양식을 띌 수밖에 없다. 즉 이것은 필요성에 의한 양식이다. 우리가 단지 껍질만을 가져와, 디자인적 경제성을 정확한 판단 없이 차용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그 외에 바우하우스가 우리 한국에 끼친 영향력은 학제를 편성하여 커리큘럼을 가지고 기초 디자인을 교육했다는 점이다. 바우하우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교육이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초교육을 시켰다. 그에 비해 우리의 기초교육은 의심스럽다. 잠시 기본기의 중요성에 대해 여론이 생기다가도 금세 사그라졌다. 기초교육이란 것은 동일한 내용을 다른 양식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현재의 미술 대학들은 기초보다는 실전으로 일단 진입시키려 하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우리가 충분히 알고 실천하고 있다면 바우하우스의 긍정적 영향을 입은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다.

 

바우하우스가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데에 가장 일조를 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

1900년대 말경에 이미 과학 기술 사회로 접어들었고, X선, 전자 등이 연속적으로 발견되어 서구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배한다는 사실에 온통 난리가 난다. 그것도 신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에 의한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고,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숭배가 엄청났던 시기이다. 기술 문명은 말할 수 없이 가지를 쳐, 사회 전체에 특히, 서방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폭발적으로 지식이 증가하였다. 조형적 감수성과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조직화를 시도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모멘텀(Momentum)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기적인 표현에서 기하학적인 표현으로, 공방제 생산방식에서 기계생산방식으로 전환이 되면서 이 방식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과정이 중요하였다. 이것을 바우하우스가 홀로 주도한 것도 아니고, 기하학 주의적인 양식이 유난히 그 학교를 통해 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정도라 하겠다. 바우하우스를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즉 현실 인식이다. 이론이나 역사를 배우는 것은 반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저 연표나 외우는 것에는 왜 배우는가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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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전문은 <지콜론> 3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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