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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위해

정시화

이 칼럼은 정시화 국민대학교 명예교수와의 4시간여 인터뷰에 대한 기록이다. 61년 당시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 학생으로 디자인계에 발 들인 그는 졸업 후 황량한 디자인 교육 현장에 투입된다. 이후 타고난 연구정신으로 디자인을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몰두해 왔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디자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이다. 그는 지금도 더 이상 디자인이 미술의 그늘 아래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일관된 목소리와 태도로 가르치고 있다.

에디터 이찬희 ㅣ 사진 박현진

 

 

인터뷰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우리나라 디자인사의 앞에 선 분을 만나, 한국 디자인의 산 역사를 듣고 기록하려는 의도로 인터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인터뷰를 기회로 이 분야의 선배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시각디자인의 디테일한 부분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인터뷰를 사양하려고 했습니다. 디자인 창작 분야 쪽은 인터뷰 할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디자인 분야 선배들이 어떤 과정으로 디자인 공부를 했고, 창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후학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60년대 초에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디자인(교육)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교과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61학번인데, 60년대 당시에는 주로 서울대, 홍대, 이화여대가 우리나라 미술교육을 담당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시각디자인이란 말은 물론 디자인이란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대신 응용미술이라는 용어가 있었죠. 저는 65년에 졸업했는데 64년까지의 당시 대학교 응용미술학과 교과과정은 일반 교양과목 빼고는 전공실기 과목뿐이었습니다. 이론과목이란 미술사, 미술감상 등이고, 실기과목은 공예미술, 상업미술 등의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그 외 미술대학을 졸업하면 중등교사 자격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학 관련 과목이 다수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미술대학 졸업생들이 중등학교 미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순수미술학과 졸업생들은 대부분 미술교사로 진출하지만 당시의 응용미술학과 졸업생들은 미술교사보다는 기업에 취업했습니다. 초창기 응용미술학과 졸업생들은 제약회사에 많이 취업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약회사들이 신문광고를 많이 하니까 응용미술학과 졸업생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러한 교과수업을 할 수 있는 교내 실습실이 어느 대학에도 없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이전에 디자인을 공부하셨습니다. 왜 미술이 아닌 응용미술(디자인)을 선택했는지 연유가 궁금합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에게 왜 디자인을 했느냐 라고 물어본다면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라고 대답합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어릴 때 기억은 그림 그린 기억밖에 없습니다. 나는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때부터 고 3학년까지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장차 훌륭한 미술가가 된다는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림 그리는 일 외에는 특별한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며, 또 그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는 모두가 다 가난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대학시험에 응시조차 못하고 고향인 부산에서 1년(1960년)을 지냈습니다. 그 1년이 나의 인생(?)을 변하게 한 계기를 주었지요. 막연히 그림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회화과가 아닌 응용미술학과로 진학하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어 대학을 졸업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응용미술을 선택한 현실적인 동기이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당시 미술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나의 갈등입니다. 청소년 시절 내가 그림에 몰두하는 동안 끊임없이 나를 강박하는 콤플렉스는 일반 사람들의 미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림 그리는 직업은 빌어먹는 직업이다. 그림쟁이(환쟁이)의 생활은 비정상적이고 심지어 퇴폐적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는 학생은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는 등의 인식을 말하지요. 이러한 인식은 아마 서양의 벨 에포크 시대의 가난한 미술가들의 이미지에서 연유하며, 일제시대 동경에서 유학한 미술가들의 가난한 삶에서 연유한 인식일 것입니다. 그림에 재능있는 사람들이 미술을 전공한다고 해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지요. 나름대로 반발심이 있었고, 그래서 그림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막연했지만 미술이 아닌 응용미술을 전공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또래의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습니다.

미술가, 예술가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거기에서 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 응용미술(디자인)이셨군요. 가난한 시절에 응용미술과에 입학하고선 생각하신 것처럼 미술과 확실히 다른 교육,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61년 대학을 들어오고 나서 내가 몰두한 것은 ‘응용미술은 미술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들어왔을 때의 느낌은 너무 막막했습니다. 다를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응용미술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으며,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상황입니다. 차라리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면, 그냥 없는 대로 잘 지내겠지요. 그런데 나는 1년간의 공백기간 동안 생각한 것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아르바이트도 하고 응용미술을 공부해야 한다는 열정이 있었는데, 뭘 찾아보려 해도 자료도 없고, 모범이 될만한 사례도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당시 다른 동급생들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절실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학구적 열정이라고 할까요. 1960년대 내가 졸업할 때까지 우리를 가르친 교수님들은 30대였어요.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동시대 사람이었죠.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를 가르쳐준 은사들도 객관적으로 보면 응용미술 교육에 관한 축적된 노하우를 갖지 못한 교수들이었지요. 당시로서는 서울미대 자체도 축적된 교육 노하우가 없었지요. 서울대, 홍대, 이대 등 해마다 신입생이 들어오는데, 교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대였지요. 데이터, 노하우, 자료 등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학생신분인 당시로서는 그 당시 교육의 문제점을 느끼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설사 알았다고 한들 밖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지금이나 과거나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시로서는 질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분위기였지요, 무조건 작업을 하는 것,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learning by doing’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질문이나 이론(?)적으로 알려는 사람은 문제학생처럼 인식되었던 시대지요. 이때부터 나에 대한 인상이 실기보다 이론에만 관심이 있는 학생으로 비쳐졌지요. 그래서 지금도 나를 두고 이론교수라고 말한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보고 이론, 이론 하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남 밥그릇 뗄 일 있느냐.’라고. 나는 1976년 국민대학교에 올 때 디자인 창작실기교수로 온 거지 이론교수로 온 게 아닙니다. 디자인 창작실기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탐구가 필요한 것이고 이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것뿐입니다. 이건 나의 디자인 교육 철학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대학에는 볼 것(자료)도 없고, 듣고 읽을 것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 개인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앎의 욕구가 강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응용미술 창작에 몰두할 수 없었습니다. 응용미술에 대한 지적 욕구와 탐구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습시설도 없고 미술과 별반 다르지도 않는 것 같고, 누가 이야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선배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환경도 아닌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책을 통해서 알아야겠다는 욕구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책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합니다. 수공업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던 60년대 초였으니까 당연하지요. 이때의 국산품 전시회는 주로 나전칠기, 왕골제품, 민예품 등이 주류였으니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패션(의상) 분야에서만 통용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공예미술, 응용미술, 생활미술 심지어 도안 등으로 인식되었던 시대였습니다.

국내 디자인 전문서적(번역서도 포함하여)이 전무하던 시기로 예상됩니다만, 그럼 당시 응용미술(디자인)을 가르치시던 분들은 대부분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 유학하신 분들이셨나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우리의 미술교육을 담당했던 1세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2세대에 속하지요. 해방 후 한국 미술계를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일본 동경미술학교와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사람들입니다. 1931년부터 1943년까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한국인 유학생은 140여명이며, 그 중에서 해방 후 한국에서 두각을 나타낸 화가들을 살펴보면 한국 근대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이들 중에는 프랑스에 유학한 화가들도 있었지요. 화가들 중 기억나는 사람들로는 박상옥, 이쾌태, 이세득, 장욱진, 최덕휴, 홍종명, 권옥연, 김창락, 손동진, 이유태, 이중섭, 황염수 김창억 등으로서 이들은 중고교 미술교사 혹은 대학 강사, 회화과 교수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화가들에 비해서 응용미술에 해당하는 유학생은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동기간 동안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과, 도안공예과, 공예도안과에 입학한 한국 유학생은 불과 10여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은 중퇴 혹은 해방 후 활동이 거의 알려진 게 없습니다. 일본 동경 미술학교 도안과 졸업생으로서 1946년 서울대학교 도안과(곧 응용미술학과로 개칭)를 창설하고 1970년 정년퇴직한 이순석(1905~1986)교수는 60년대 응용미술교육과 국전의 공예, 그리고 상공미술전람회 주도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김재석도 제국미술학교 공예도안과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국전에도 관계했으며 대학 강사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응용미술교육은 어떤 확고한 교육이념이나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해방 후 대학교육의 필요에 의해서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서구교육을 받은 미술가와 공예가들에 의해서 응용미술 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일본적인 공예미술, 공예도안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6.25 동란 후 1958~60년 사이 한국 공예시범소의 미국 연수프로그램으로 교육받은 젊은 교수(서울미대 권순형, 민철홍 교수)들을 통해서 미국의 디자인 교육방법도 한국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침략기를 거쳤다고 하지만 60년대 당시 디자인교육 현장에 일본에서 공부한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니,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생각되지만 서글픈 현실이었겠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책으로 실시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출품하고 수상한 화가들과 공예가들도 해방 후 한국의 화단과 응용미술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한때 미술잡지들이 이때 활동한 화가들을 친일파들이라고 매도한 적도 있었지요. 선전은 1922년에 조직되었는데 10년 뒤, 1932년에 공예부가 추가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피식민지 조선의 공업발전을 바라지 않았겠지요. 공업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조선시대 수공업까지 근대공업으로 발전하도록 할 리가 없지요. 조선의 전통 장인들의 기술이 근대 공업으로 발전하도록 장려하기보다는 미술전람회 제도를 만들어 전통적으로 천대받던 조선의 공예장인을 미술가로 격상시키려 했던 전람회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장인들은 한이 많습니다. 아무도 장인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아서입니다. 오히려 천대했지요. 그래서 장인 기술을 자랑하지 않고 숨기며 자식에게 대를 물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공예기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지요. 조선의 비극은 아마 조선의 수공예가 기술적으로 더 발전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공예가들을 산업기술로 발전시킨 게 아니고 교묘하게 미술가로 변질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단이 조선미술전람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인이 선전에 출품해서 수상하면 공예 미술가로 대접받지요. 사농공상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심리라고 할까요. 그래서 공예는 산업보다 미술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만난 미술가와 공예미술가들이 결국 초기 응용미술의 교육을 맡았었던 거네요. 해방 이후에는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다 같이 동료라 칩시다. 미래가 열렸어요. 협회 만들어 활동해야겠지요. 해방 다음 해, 1946년 한 해 동안에 결성된 미술관련 협회는 7개 정도였습니다. 모두 조선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이니까 그렇겠지요. 조선미술동맹(한홍택, 김봉룡), 조선조형예술동맹(강창원, 박성삼, 한홍택, 정순모 등), 조선미술가동맹 조선나전칠기공예협회(김진갑), 조선산업미술가협회(한홍택, 조능식, 조병덕 등), 조선공예가협회(김재석, 백태원, 강창원, 김봉룡, 박철주 등), 조선상업미술가협회(김중현) 등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1949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공예부의 조직에 관계했으며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국전의 공예는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응용미술교육의 배경입니다. 지금은 거의 작고했으며, 이들의 활동은 시간관계로 말하지 못하지만 1960년대 한국 응용미술교육에 직·간접적으로 역할하셨던 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술가와 교육자간의 구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생존에 급급하던 시대에 미술가들이 호구지책으로 중등 미술교사나 대학 미술교사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생활이 나아지면서 교사나 교수직을 떠난 화가도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미술가가 가르친다는 것은 도제교육의 수준을 넘지 못하지요. 그런데 현대 대학교육이란 프로그램 교육이어야 하지요. 프로그램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 대학의 미술교육과 응용미술(디자인)교육의 바탕은 프로그램 교육에서부터 출발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론적 바탕이 없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창작 실기교육시설이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실습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예실습을 할 수 있는 실습실이나 물레, 가마 등이 전무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전기도 들어가지 않았던 여주 이천 시골 도자마을에서 여름방학에 잠깐 동안 실습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현대 디자인 교육이 전통적인 수공예 공방에서 체험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교육의 질은 짐작하고도 남지요. 목공예 수업의 경우는 교실에서 종이 위에 아이디어 스케치 한 것(렌더링)과 모눈종이 위에 그린 도면을 시중 목공소에 제작을 의뢰하여 국전에 출품하거나, 교내에 전시하는 방법과 과정을 공예미술 또는 응용미술 나아가 디자인이라고 인식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발주공예라고 말합니다. 한때 나는 이러한 현상을 ‘돈은 학생이 내고 재미는 목수가 본다.’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디자인이라고 말하는 수업의 거의 모든 과제는 켄트지에 포스터컬러 물감으로 포스터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1990년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럼 디자인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건 구체적으로 언제인가요? 그리고 응용미술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간단히 말하지요. 우리나라 현대 디자인은 1960년대 공업 근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질문에 답하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응용미술 이전에는 일제시대부터 공예와 도안이었습니다. 응용미술은 1960년대의 용어로서 생활미술, 공예미술, 상업미술, 공업미술 등을 총칭하는 용어였습니다. 1966년 대통령으로 개최한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도 1부 상업미술, 2부 공예미술, 3부 공업미술로 구분했습니다. 제 4부는 굿-디자인부로서 부분적으로 디자인 용어를 사용했지만 대학의 학과 명칭과 교과목에도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미술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상공미술전람회의 명칭이 법제처를 거쳐 대한민국 산업 디자인전(Industrial Design)으로 개칭된 것은 1977년 제 12회 때부텁니다. 따라서 디자인이라는 용어도 이때 그 적법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여전히 인습적인 명칭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시각디자인, 공업디자인이라는 대학 학과 명칭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입니다. 전국 모든 대학교의 응용미술 관련학과는 모두 미술대학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국민대학은 1970년대 말에 구조조정을 통해서 응용미술관련 학과로만 구성한 한국 최초의 디자인 대학인 조형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디자인 대학이라고 명명하려 했지만 당시 일반적인 사회통념이 디자인을 외래어로 인식하고 있어 부득이 조형대학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대신 대학의 영어 명칭은 ‘college of architecture and design’으로 표기함으로써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디자인 대학을 선언한 것입니다. 조형예술대학이 아니고 조형대학으로 출발한 다음 교수들이 밤낮으로 열심히 가르친 학생 작품을 갖고 3년간 연속해서 전국 순회 조형전을 개최했는데, 이때 내건 슬로건이 ‘한국 유일의 조형대학’이었으며, 디자인의 개념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뒤 울산대학교에도 조형대학이 등장했으며, 80년대 후반에는 천안의 상명여자대학교에서 7개 학과로 구성된 디자인 대학이라는 명칭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디자인의 시작을 한글 창제 때부터 보는 견해도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논의하는 디자인은 넓은 의미의 용어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예술가다.’ 말은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예술이나 예술가를 논의할 때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지요.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디자이너이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디자인도 이러한 의미의 디자인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용어 개념의 디자인은 보통 창조적인 기획의 의미로서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모든 분야에서 누구나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정치가들도 시민운동가들도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도 디자이너입니다. 한글은 디자인 영역 상 시각디자인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시각디자인, 특히 문자디자인을 고찰할 때 한글이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날 논의하고 있는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산업디자인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industrial design)의 준말입니다. 허버트 리드는 산업디자인은 원래 영국적 개념이라고 힘주어 말했으며, 디자인 전문가 스티븐 베일리도 오늘날의 디자인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부터 비롯된 분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은 60년대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현대 디자인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는 수공예 시대이지요. 수공예(우리들이 공예미술이라고 말하는)는 디자인 전 시대의 산물이지 디자인은 아닙니다. 산업혁명의 특징은 신소재(철강), 표준화 시스템, 기계적 대량생산으로 유통되는 새로운 생활제품의 생산 그리고 판매와 관련된 20세기 조형(gestaltung)분야를 말합니다. 우리의 디자인, 이른바 산업디자인은 이러한 근거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디자인 분야가 아주 확대되었다고 해서 시간(시대)과 공간(영역)의 한계 없이 무한한 영역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전문 분야는 다른 분야와 차별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분야의 독자성과 자율성, 그리고 존재가치를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디자인 전공자가 엔지니어는 아니지요, 또 발명가도 아니지 않습니까. 디자인에도 발명적인 요소가 있지요. 그러나 디자이너를 발명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디자인이 과학적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지만 과학자는 아니지요. 디자인이 많은 분야와 관련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디자인은 디자인일 뿐입니다. 한글 디자인은 다음 번 질문에서 다시 말하겠습니다.

 

 

 

 

정시화(1942년 부산 출생)

부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대학원, 동교육대학원. 덴마크 그래픽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68년 디자인론을 강의했다. 한국 최초의 디자인 번역서와 저서를 출판했으며, 우리나라 대학 디자인 교육에서 <디자인론>을 처음 강의하였다. 1976년~2007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로서 시각디자인 실기와 색채 디자인, 디자인 이론을 담당해 왔으며, 교수재직 기간 동안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해 왔다. 대한민국 산업 디자인전 추천-초대 디자이너로서 심사위원도 역임했으며, 제일기획, 88서울 올림픽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70년 이후 여러 잡지에 디자인 글을 통해서 디자인의 중요성 홍보했으며 외국 디자인 잡지에도 한국 디자인에 대해 소개하였다. 1972년 이후 한국 시각디자인 협회(ksvd)의 국제담당 부회장으로서 세계 그래픽 디자인 단체 연합회(Icograda)의 총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한국의 시각 디자인을 홍보하는 일도 했다. 계원조형예술대학 설립 때의 전체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 창안에 참여하였다. 주요 저서는 현대 디자인 연구, 산업 디자인 150년이며, 주요 논문은 <한국인 색채의식>, <한국 색채문화의 특성>, <색채 지각 공간 표기에 관한 연구>, <덴마크 디자인의 에센스>, <문화적 정체성과 디자인>, <디자인학의 미래>, <한국 디자인 교육의 전망>, <환경시대의 디자인> 등이 있다. 2007년 정년퇴직 후 현재 여러 대학의 디자인 석박사과정에서 디자인 연구방법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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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인터뷰는 2011년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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