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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디자인하다

디자이너 이상철

 

인터뷰, 글 김뉘연 ㅣ 사진 박현진 ㅣ 내지디자인 나은민 ㅣ 에디터 이찬희

 

“50년 가까이, 오래 버텨왔을 뿐입니다.”

디자이너 이상철의 이름은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잡지사에 굳건히 뿌리내린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두 잡지의 명성과 더불어 기억되어 왔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칠순이 머지않은 이상철의 디자인사 50년은 편집 디자이너라는 직함만으로 결코 품을 수 없다. 자신을 프로젝트 프로듀서(project producer)라 일컫는 그는 지면을 넘어 이 사회를 디자인해 왔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새, 오늘도 꾸준히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고 있다. 이상철이 세웠고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 이가스퀘어(IGA²)는 종로구 운니동 가든타워 6층에 자리하고 있다. 창덕궁 근처의 이 고즈넉한 건물에서 15년 남짓을 난 그는 인터뷰에 앞서 미리 이야기를 나눌 것을 청했고 그리하여 두 번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때마침 연이은 폭우로 인해 사무실은 다소 복잡했지만, 날씨가 쾌청했더라도, 온갖 귀한 물건들이며 인쇄물이 무수한 이곳은 여전히 북적일 터였다.

 

 

입구에서 선생님 자리까지 들어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눈을 뗄 곳이 없어서요.

그런데 우리 직원들은 나 때문에 좀 피곤할 거예요(웃음). 아무 물건이나 들여놓을 수 없거든요. 디자인적인 가르침이 없는 물건들은 이곳에서만큼은 내치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물건뿐 아니라 책이며 잡지들도 넘쳐납니다.

살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책을 살 여유는 되므로, 제 기준에서는 부자이지요.

 

그런데 건네주신 명함 뒤에 올해 초 열렸던 디터 람스 전시의 테마 ‘Less and More’가 적혀 있습니다.

디터 람스 한국 전시를 기획했거든요. 세계 순회전은 일본 오사카의 산토리 뮤지엄 큐레이터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예박물관 수석학예실장이 기획했고요. 참 좋아하고 존경하던 디자이너였는데, 이번 기회에 그분 댁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많이 보아 익숙했던 그 공간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죠(웃음). 어쨌든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서울에 오셨을 때 동행하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독일의 조명 디자이너 잉고 마우러는 이 건물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15층과 17층 두 층을 쓸 때였는데, 제가 머물던 15층에 와보고는 내뱉은 한마디가, “Incredible!”(웃음). 일전에 잉고 마우러의 뮌헨 사무실에 간 적이 있는데 그 꼴이 제 사무실과 비슷하더라고요. 사무 보는 공간은 그야말로 손바닥만 하고 나머지 공간들은 책이며 물건들, 그것도 온갖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잡동사니들이 가득했어요. 그가 저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더니(웃음) 제 책상 앞 회전의자에 앉아 빙빙 돌면서 기념 사진을 여러 장 찍어 갔죠. 생각이 비슷하면 각자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 또한 비슷하고, 또 금새 친해지나 봅니다.

 

선생님의 성함을 처음 전해 듣게 된 것은 어느 디자이너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서 출간된 『판소리 다섯 마당』의 지면을 펼쳐 보여 주면서였습니다. 책장을 넘기던 중 본문의 글줄을 각주가 압도하는 페이지를 마주하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었는데요.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서 펴낸 시리즈뿐 아니라 고 한창기 발행인과 함께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만드신, 당대에 이름난 아트디렉터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근황을 알고자 여러 디자이너들에게 물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동료 디자이너들과 간간이 왕래도 했습니다만 요즘은 발길이 뜸합니다. 그리고 제가 서울대학교나 홍익대학교 출신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학계와는 인연이 멀고요. 지난 50년을 되돌아 보건대 저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공백기가 없었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 시험을 치렀다 낙방했는데 마침 곧바로 한국산업은행에 취직을 하게 됐지요. 그렇게 졸업하자마자 직장에 다녔으니 전연 아는 바가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 미술반 활동만 했을 뿐 디자인에 대한 개념 자체도 없었고요. 그런 마당에 사회생활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죠. 당시 제가 산업은행에서 했던 일은 홍보 업무였습니다. 담당자가 저 혼자라 도맡아 하게 됐어요. 그때가 1962년도, 즉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던 때였어요. 산업은행이 일반 업무를 보지 않고 정부 살림을 보던 시절로, 가난했으니 선진국에서 차관을 끌어들여야 했는데, 그리 하려면 이 개발 계획의 기대치, 즉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의 홍보 책자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나 혼자 카메라를 메고 지방을 돌며 현장 취재를 했어요. 그렇게 겁 없이 사진을 찍고, 조사부에서 글을 받아 책자를 만들기 시작했죠. 정부의 중요한 계획을 알리는 것인 만큼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 사양의 새로운 기계들을 들여와 인쇄했어요. 레이아웃이며 종이 선택은 제가 하고요. 그런데 그 일이, 싫지 않고 좋더라고요. 그렇게 편집 디자인 일을 일찍이 시작했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홀로 일해오신 것이군요.

이상하게도 저는 항상 상관이 없었어요. 물론 직급상으로는 윗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실무에 있어서는 혼자 모든 것을 해나가고 결정해야 했지요. 그렇게 50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은행에서 맡은 일들이 재미가 있었고 또 정말 바빴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에 서울대학교에 재도전하려다 포기하고 한 해 한 해 넘기게 됐죠. 그러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디자인 쪽에 재능이 좀 있는 것 같으니 이걸 더 잘 활용해야겠다는 판단에 단국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했어요. 군대 가기 전 2년 반 정도 다녔는데, 제대하고 나니 복학하기가 싫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만두고 다시 일했습니다.

 

어린 시절 재능에 얽힌 특별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나야 잘 몰랐어요. 주변에서 잘 그린다고들 하니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다만 아버님이 그림을 그리시던 분이라 관심 있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고 공모전에 나가서 한번에 두세 가지 상을 탄 적도 있기는 합니다만, 뒤늦게 산업은행에 다니면서부터야 나에게 디자인의 자질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다음에는, 일밖에 없었어요. 오직 그림, 디자인이 그렇게 좋았어요. 명동 뒷골목 중국대사관 근처에 당시 유일하게 서양 책과 잡지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었어요. 거기서 매일 살다시피 했죠. 또 남대문 시장의 군수물자 상점에도 자주 가고요. 군대 물건이 좋았거든요. 군인 가방에서부터 온갖 의류들, 담요… 다 좋아했어요. 군대 물건이 정말 잘 만들어졌구나, 디자인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고요. 아마 집 여기저기 숨어 있는 군수품들을 찾아내 다 모으면 조촐하나마 전시를 열 수도 있을 겁니다. 이뿐만 아니라 남대문 구제 시장에서 발견한 버튼다운 셔츠를 즐겨 입었고, 브룩스 브라더스를 좋아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위의 경험들이 디자인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밀리터리 마니아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는데요(웃음).

그렇게 많지는 않고요(웃음). 난 콜렉터는 아니에요. 사람들이 여기 오면 물건 종류가 많으니까 지레짐작하는데, 콜렉터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은 맘에 들건 안 들건 갖춰놓는 게 중요하잖아요. 나는 달라요. 내 맘에 들어야 해요. 볼펜 한 자루라도, 컵 하나라도 마음에 차야만 고르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 제대로 디자인되지 않은 것은 가르침을 주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선생님 이력을 살펴보니 산업은행에서 꽤 한참을 일하셨습니다. 20대 내내 그곳에서 일하신 셈인데요.

그때는 지금과 달랐어요. 한번 입사하면 나오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죄 짓는 것 같았죠. 그런데 저도 오래 전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1969년인가 1970년에 엘리건스라는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로 옮기게 됩니다. 엘리건스란 계선산업의 옛 이름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인테리어 디자인 사업을 시작한 곳이 아닌가 싶어요. 그곳의 장충섭 사장님이 절 삼청동 사무실로 데리고 가셨는데, 당시로서는 구경도 못했던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의 가구로 채워진 사무실 분위기며 온갖 외서들이 즐비한 그곳이, 마치 제 고향 같은 겁니다. 여기야말로 내가 일할 곳이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업무를 도맡아 하던 상황이라 산업은행에서 쉽게 놓아주질 않았고 그래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낮에는 은행에서, 퇴근 후에는 엘리건스에서 일한 것이죠(웃음). 당시 일본 사람들이 설계해 한국에 세우는 호텔들이 몇 곳 있었는데, 엘리건스에서는 이러한 호텔 CI와 관련 그래픽 작업들을 하게 됐어요. CI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장충섭 사장님이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의 발행인인 한창기 씨와 친분이 있었던 겁니다. 서로 왕래를 하고 계셨는데, 저야 은행 퇴근 후 밤에만 출근하니 그분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죠. 그렇게 한 6개월 지났나요. 어느 날 장충섭 사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한창기 씨가 좋은 그래픽 디자이너를 구해 달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겪어본 결과 자기보다는 한창기 씨와 일을 하는 게 제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의 저는 그게 무슨 소린지도 잘 몰랐어요. 그냥 여기서 일하겠다고, 여기서 브리태니커 일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죠. 그래서 일단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의 몇 가지 프로모션 자료들을 디자인했고 또 <배움나무>라는 사외보 작업도 해드렸어요.

 

그렇게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와, 한창기 발행인과 연을 맺게 되신 것이군요. 1970년대의 시작을 함께 하신 건가요?

1971년 1월 1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어요. 한창기 씨가 장충동에 사실 땐데, 그날 파티가 열리는데 브리태니커 회사 시카고 본사의 아트디렉터가 참석한다고, 같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셔서 어렵게 찾아갔죠. 도착하니 파티가 무르익었는데 나로서는 이전에는 별로 보지도 못했던 광경이었죠. 약간은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는 파티가 끝난 후 슬쩍 나오려 했는데, 좀 보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남아서 이야기를 길게 했지요. 뭐… 같이 일하자는 얘기지요. 능력 있는 사람이 형무소 같은 산업은행에서 무얼 하겠느냐고(웃음). 말씀을 워낙 잘 하셨거든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던 나는 무어라 하시면 얼떨결에 “네네” 답만 하다가 걸려들었지요. 그러고 나왔는데… 바로 편지가, 발령장이 날라온 겁니다. 2월 25일부로요(웃음). 그런데 은행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3개월간 이중봉급을 받았죠(웃음). 그렇게 한창기 씨가 나를 영입하고, 이제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는 롯데호텔 바로 건너편 건물을 나와 당시 근대화의 상징으로 통했던 삼일로빌딩 25~26층을 쓰게 됐는데, 그곳의 인테리어를 엘리건스가 담당하고 저는 한국브리태니커 회사 쪽 담당자로 일하면서 관계를 정리했어요. 그리고 그때 온갖 해외 디자이너 가구들을 직접 구입해 썼습니다. 두 분이 그런 점에서 잘 맞았어요.

 

1970년대 초 국내 사무실에서 해외 디자이너의 가구들을요?

당시 가구 회사로는 두 곳이 대단했죠. 놀 인터내셔널과 허먼 밀러. 놀은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등 건축가들의 디자인 가구를 주로 생산했고, 허먼 밀러는 찰스 임스 부부의 의자가 참 좋았죠. 사무실 두 개 층에서 그런 걸 쓴다는 건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했죠. 요즘도 사실 어려운 일 아닌가요. 그런데 그때부터 그런 가구들을 직접 쓰고 만졌던 겁니다. 또 그렇게 공간을 맡아 디자인하다 보니 디자인의 입체적 조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요. 제가 이렇게 겁이 없었어요. 누가 무얼 해달라 하면 그냥 다 했어요. 사전 지식이 없어도, 사람이 사는 공간이지 별건가 생각하고서요. 그러면서 자연히 제 디자인 영역이 확대됐죠. 이후 뉴 비즈니스 개발 등 새로운 일들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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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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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잡지 <뿌리깊은 나무> 표지 디자인 _ 1978. 9

2. 잡지 <샘이 깊은 물> 표지 디자인 _ 1997. 10

3. 잡지 <샘이 깊은 물> 내지

‘바람, 바람, 바람’디자인 _ 1995. 10

4. 잡지 <샘이 깊은 물> 내지

‘바람, 바람, 바람’디자인 _ 1996. 5

5. 디터람스의 디자인 10계명 ‘Less and More - The Design Ethos of Dieter Rams’ 포스터 디자인 _ 20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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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기사는 <지콜론>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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