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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주제에 대한 디자인 안과 밖의

두 가지 목소리를 듣습니다.

 

에디터 박현진 이상현



 

 



반값등록금과 보편교육의 장으로서의 대학

글 김사과



 

사회적으로 초, 중등 교육은 의식주와 함께 일종의 기본재로 취급된다. 어찌됐든 고등학교까지는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고등학교까지를 의무교육으로 간주하며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을 기본적인 부모의 도리로 생각한다. 만약 어떤 부모가 임의로 자식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으면(대안학교에 보낸다거나 홈스쿨링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주위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 부모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육의 경우는 좀 다르다. 사람들은 공적으로 대학교육을 필수재로 간주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두가 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적으로 생각했을 때, 즉, 고등학생인 나나 혹은 고등학생인 내 자식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대학에 가는 것은 절대명제다. 아마도 이런 모순이 대학진학률이 팔십 퍼센트에 달하여 사실상 거의 의무교육과 다를 바 없게 되었으면서도 동시에 모두가 사적으로 엄청난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을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기 위해, 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힘쓴다. 그것은 자식들도 마찬가지고, 실제로 초, 중등 의무교육시절은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들로 채워진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을, 더 좋은 대학을 가려는 것은 각 대학설립이념에 어떤 점잖은 말이 쓰여 있건 명백하게 계급상승 혹은 계급유지를 위해서다. 실제로 일제 식민지 시절, 대학진학은 조선인에게 허용된 거의 유일한 계급상승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대학진학은 사회통념상 더 나은 직업을 갖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나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궁극적으로 더 나은 삶을 쟁취하기 위한 보증수표였다. 실제로 오랫동안 그 전략은 통했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은 기를 쓰고 대학을 가기 위해 애를 쓴다. 얼마나 힘든 과정이 그 앞에 놓여 있건, 등록금이 얼마나 비싸지건, 사람들이 그것을 감수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대학 진학 이후의 삶이 보장된다면, 그 정도의 투자는 확실히 손해가 아니다. 문제는 그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전략이 이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보편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때라는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대학교육을 감당할 수 있는 야망과, 지식수준과,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대학진학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에 발맞추어 대학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모두가 승리를 향한 전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위에 말했듯이 애시당초 사적인 계급투쟁에 있어서 모두가 승리하는 전략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는 없다. 모두가 대학에 가게 된다면 대학에 가는 것은 더 이상 이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대학 사이의 서열화는 더욱 정교화되고, 또 좀 더 사정이 좋은 사람들은 아예 영미권의 명문대학으로 떠난다. 이제 대학은 가면 좋은 곳이 아니라 안 가면 안 되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대학이 더 나은 사회적 위치를 보장해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에 호응하여 대학들은 자꾸만 문턱을 높인다. 아무나 쌓을 수 없는 각종 스펙을 요구하고, 영어실력을 요구하고, 더 높은 성적을 요구한다. 물론 대학들도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들 스스로도 살아남기 위해서 타 대학과의 경쟁에 뛰어든다. 아이비리그를 목표로 삼아 영어강의를 늘리고, 스타 교수를 확충하고, 화려한 건물들로 캠퍼스를 가득 채운다. 물론 거기에는 엄청난 돈이 들고,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아이비리그의 규모를 따라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가된다. 하지만 더 나은 대학에 가는 것이 지상명제인 학생과 학부모들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런 둘 사이에서 정부가 적절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 이런 식의 자본주의적 경쟁에 쉽게 뛰어들 수 없는 지방의 국립대학은 경쟁에서 거의 도태되고 말았다.

짧게 보면 이 치킨게임에서 도태되는 학생들과 대학들이 많아질수록 살아남은 학생과 대학들은 더 큰 승리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멀리 봤을 때 이 게임은 일차로 한국의 교육을 통째로 산업화할 것이고(이것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교육은 보편성을 잃고 지배계층의 이익에 복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결국 한국의 ‘교육산업’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아이비리그와 옥스브리지 두 거대한 브랜드로 상징되는, 자본과 인재와 권력의 독점을 통해 막강한 경쟁력을 보장받는 영미권의 교육산업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교육산업은 서서히 붕괴할 것이고, 손쉬운 시장으로서 영미권 대학 프랜차이즈에 전면 개방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교육’과 ‘산업’ 둘 다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대학은 자신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장소라는 환상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한편(그것을 통해 정부에게서 각종 혜택과 지원을 받아낼 수 있다) 실제로는 철저하게 문을 좁히고 서열화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환상의 유지에 공모한다. 대학을 지식의 전당으로 떠받들고 온갖 권위를 부여하며 교수들은 교양 있는 지식인 역할을 손색없이 코스프레한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환상에 사로잡힌 채 계속해서 높아만 가는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더 많은 빚쟁이 학생들이 양산되고, 좌절한 부모들이 자살을 한다. 대체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얼마전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만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 ‘임금과 학위dollar and degree’라는 글에서 대학 진학률을 높이는 것을 통해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오바마 정부를 비판한 적이 있다. 오바마는 실제로 자주 한국의 놀라운 교육열을 언급한다. 그것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적었듯이 한국의 현실은 절망적이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개인이 더 높은 교육을 받는 것은 그 한 개인을 좀 더 나은 취업환경에 놓이게 할 수는 있지만 취업환경 자체를 개선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모두가 이 게임에 몰려듦으로 인해서 예상치 못하게 사회 구성원 전체의 지식이나 교양의 질이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노동환경의 개선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폴 크루그만이 글에서 지적하듯이 노동문제의 개선은 노동문제 자체를 개선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특히 진보진영에서 북유럽 모델을 주기적으로 들고 나온다. 하지만 박권일은 황해문화 2010년 봄호에 기고한 ‘한국인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이런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북유럽 모델은 대학을 진짜 학문을 위한 소수의 공간으로 특성화하여 공부를 할 사람만 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등학교만 나와서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학진학률이 80퍼센트가 넘은 상황에서 그런 식의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박권일은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대학이 엘리트교육의 장이라는 허울뿐이고 기만적인 포장을 벗고 진정한 보편적 공공의 장으로 재탄생하는 길을 제안한다. 이것은 흥미로운 제안인데 왜냐하면 위에 적었듯이 현실에서 교육이 보편교육이라는 그럴듯한 이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가진 자들의 구별짓기 전략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해서 그 그럴듯한 이념을 정말로 현실화하기를 요구하는 어쩌면 진정 급진적인 제안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둘러싼 이념과 현실의 기만적 불일치에 대해서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허울뿐인 이념을 아예 폐기해 버리자는 가장 속류적인 선택을 지지하거나 혹은 말만 조금 바꾸어 기만의 레토릭만을 좀 더 세련되게 수리하는데 그치는 것에 비하면 특히 그렇다. 이 요구는 노동문제의 해결과는 별개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육의 보편적 확대를 지지하는 폴 크루그만의 입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나 또한 이 입장에 동의한다. 문제의 제대로 된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일단 노동문제와 교육문제를 구별해서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허울뿐인 듣기 좋은 말들을 허울뿐이라며 쓰레기통에 처박는 대신, 실제로 작동 가능한 이념으로써 구제해야 한다. 그렇다, 이제 보편교육의 장으로서의 대학에 대해 생각할 때다.



 

 


김사과는 84년생 젊은 소설가이다. 2005년 <영이>로 ‘제 8회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2010년 단편집『02』까지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명징한 현실인식을 소설 속에서 고통스럽고 직설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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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힘, 청춘의 권력

글 이정혜




2011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하의실종 패션’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그 속내는, 옷이 아니라 다리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들의 몸은 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인류라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으므로, 몸을 통해 시각의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일까? 그저 헐렁한 티셔츠 하나만 걸쳐도 몸이 당당하면 사람은 멋있어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젊음이 걸칠 수 있는 옷은 옷의 가격보다도 핏이 중요한 법이다. 이들의 입는 법, 소위 그 ‘간지’야말로 항상 청춘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미끈한 몸매를 가지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일까? 자식에게는 아름다운 몸을 갖게 하겠다는 어머니들의 발상과 이들 스스로의 노력이 단단하게 연대한 결과는 아닐까? 키 혹은 성장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해 온 한국 사회이다. 키가 큰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 어떤 비결들이 있는지, 어머니들은 나름 과학적인 정보를 수집해왔다. 그렇게 집단화된 소망이 현실이 되었다고 상상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내 몸’ 하나에도 이처럼 내력이 숨어있다면 ‘나 자신’이란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해볼 필요는 없을까? 그리고 지금 청춘들은 아름다운 몸 이외에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시대에는 젊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이기도 했다. 기성세대의 구태와 거짓됨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부르짖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젊은이들이었다. 혁명과 낭만, 젊음이 하나로 융해되어 청춘의 삶을 불살라버린 이들도 있다. 당시 젊은이들은 대단히 똑똑한 바보들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그들 대부분은 똑똑한 척만 하는 바보들이 되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자가당착이다.

헌데 학생들이나 후배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이들은 그 나이였을 때의 나보다 더 똑똑해 보인다. 지식도 많고 의외로 경험도 갖추고 있다. 본인을 포장하거나 표현하는 데도 능숙하다. 몸만 세련된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도 그렇다. 그런데도 미래가 불투명하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들의 세상에서는 아이돌과 모범생이 동의어에 가깝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그 확률을 위해서 죽을 만큼 고생을 각오하며, 적자생존의 길을 걷는다. 따라서 이들은 기성세대 앞에 겸손하며, 착하고 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2011년 대학가를 뒤덮은 ‘하의실종’은, 기이하게도 도발적이지 않다. 예쁘지만, 위협적이지 않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시장의 구조에 참 쉽게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비를 통해 본인을 표현하는 데 길들여진 이들에게 과연 탈출구는 어디일까. 나는 사실 지금 여기의 화두인 등록금 투쟁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자기 세대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기존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에게 심어줄 수 있는가. 그 과정을 통해 본인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진짜 권력을 일깨울 수 있는가. 그래서 앞으로의 삶에서도 이 경험들을 토대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인가.

 

자신을 한 그루 나무라고 상상해 보라. 싹을 틔워 줄기가 되고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고 아름드리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기 위해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라. 토양과 수분, 햇빛, 바람과 공기, 그리고 벌과 새들이 없다면, 성장이 정체되거나 시들어가게 될 것이다. 무엇 하나도 빠짐없이 중요하다. 즉 이 가운데 하나가 대학일 뿐이라면, 대학에서 앞으로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내가 한 사람의 디자이너로 자라기 위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현재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디자이너로 성장한다는 말과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대학에 다닌다는 말은 전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디자이너가 되어 한 채의 집을 설계한다고, 한 권의 책을 디자인한다고, 한 벌의 옷을 만든다고 상상해 보라. 어떤 집을, 책을, 옷을 그려야 할까? 이것만은 분명하다. 집이라면 햇빛이 들고 바람이 통하고 추울 땐 따뜻하게 더울 땐 시원하게, 그리고 사람들이 즐겁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책이라면 잘 읽히고 잘 펴지고 튼튼하고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옷이라면 좀 더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몸에 걸치는 것인 이상 뭔가 소통과 제작의 기준은 있다. 말하자면 디자인에는 시각성이나 감각뿐만이 아닌, 종합적인 시야가 필요하다. 그러한 종합적인 시야에 대한 교육은 현재로서는 대학에서 담당하지 못한다. 스스로 깨닫고 찾아내고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서서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같은 조건에서도,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지는 않는다. 결국 외부의 요인들보다, 성장하고 싶은 씨앗의 의지가 나무의 바탕인 것이다. 독학으로 자양분을 흡수하려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 설령 되었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렇게 졸업장만으로는 유세할 수 없는 직업이 바로 디자이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졸업장이 약한 누군가라도, 마음가짐에 따라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이 왜 필요한가 물어볼 수 있겠다. 본인의 노력만으로도 된다면,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고 졸업장을 따야 하느냐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대학에서 디자인 교육을 받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동기들과 선후배들, 교수들, 그리고 다른 전공자들과 함께 대화하며 가는 길은 혼자서 가는 길보다 훨씬 탄탄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토양과 햇빛, 수분, 바람과 공기, 벌과 새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주어져 있는 커리큘럼과 일들에 시간을 쏟고 난 다음에도 내가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는 시간, 얽매여있지 않아 무엇을 하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시간, 다소 멍청하게 공상할 수 있는 시간, 도서관에 박혀서 세상 모든 분야의 책들을 섭렵할 수 있는 시간, 취향과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 진지하게 토론하고 삐딱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간, 뭔가 머릿속에 잡히면 끝까지 파고들 수 있는 시간, 그것을 위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경로를 탐색할 수 있는 시간, 때로는 호기심이 지나쳐 궤도를 이탈하는 시간.

청춘의 시간들은 딱히 무어라 잘 정리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가 쌓여갈 뿐. 그러나 그 비어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면, 동일한 좌표만 반복한다면, 수분을 보충하지 못한다면, 딱딱하게 심장이 굳어 피가 잘 돌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 때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시간들이기에, 그토록 소중하다.

돈을 덜 버는 대신 시간을 얻는 것, 돈을 덜 쓰는 대신 시간을 얻는 것이 먼 미래를 위해서 더 현명한 판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등록금을 낮추기 위한 싸움은, 시간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다. 비상식적인 고액 등록금과 그로 인한 학자금 대출이 합리적으로 개선된다면,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돈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처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혼자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청춘들은 가지가 무성한 푸른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다. 자생력을 심어주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그에게 자기 시간에 대한 권한을 주면 된다.

그런데 세상은 청춘들에게 좋은 쪽으로만 돌아가질 않는다. 그래서 청춘들은 깨달아야 한다. 존중받기 위해서는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청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으며, 그 힘은 위에서의 가르침이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배움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언젠가 청춘들이 만들어 갈 세상이 지금 세상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그러기 위해서 현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진실을.


그리고 디자이너를 꿈꾸는 청춘들이라면 이러한 깨달음을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예쁘게 포장된 세계의 이면을 들추어내는 위력적인 형식을 통해 위협해야 한다. 다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지 못한다. 정말로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학습된 사고를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싸움일 것이다.





이정혜는 디자인방법론과 기획에 관심이 많아서 다방면에 걸쳐 일하기를 즐기는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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